깊은 땅속에서 손안으로, 그리고는 작은 상자 안으로 유해들이 굴러떨어졌다. 유해들이 서로 부딪히면서 모일수록 상자 내부를 밝히는 영롱한 초록색이 더욱 빛났다. 드디어 마지막 유해까지 상자에 담기자, 그 많은 불빛이 빠져나갈까 봐 두려워 얼른 뚜껑을 닫아버렸다. 잠금장치를 걸고 있는 손이 너무 떨려서 맘처럼 잘 되질 않았다. 그제야 손끝이 아려온다는 걸 깨닫...
산이 재배열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8구역 전체일지도 모른다.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눈 앞에 펼쳐진 이 광경을 설명하기에는 그 단어가 가장 적절하다고 하연은 생각했다. 그저 검을 휘둘렀을 뿐인데 그것에 대응하기 위해 구역 전체를 바꾸다니. 검이나 들고 휘적거리는 자신이 얼마나 하찮고 쉬워 보였을지 조금은 민망하기까지 했다. 대가는 컸다. ...
모든 생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끝을 향해 간다면 우린 언제쯤 끝이 다가오는지를 알 수 있을까? 그날, 전쟁이 시작되는 날, 선이 물었었다. "하연, 나랑 같이 올리브 나무 너머로 가 줄 거지? 우린 같이 죄를 짓고, 같이 운명을 거스르는 거야. 공범이 되는 거지." 선이 손을 내밀며 웃었다. 똑같이 웃고 있던 하연은 망설임 없이 그 손을 잡았다. 처음 올리브...
영이 스트라테이아에 도착하기 몇 개월 전. "신분 증명이 안 되는데요." "에헤이. 빡빡하시네. KIPE 소속으로 조회되잖아. 게다가 내가 손가락이 없긴 하지만, 흑조인은 맞거든? 진짜 확실해." 영이 열심히 주절거렸지만, 직원은 무뚝뚝한 얼굴로 들고 있던 카드를 돌려줬다. KIPE소속임을 증명해주기 위해 회사에서 발급해준 나름의 신분증이었다. 다만 이게 ...
"있잖아. 선. 나는 솔직히...." 하연은 다음 말을 삼켰다. 진짜로 네가 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도무지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대신 손가락으로 상자를 조심스럽게 훑었다. 군데군데 마감이 벗겨져서 거칠한 표면이 느껴지는 작은 갈색의 나무 상자. 떨어뜨리면 당장이라도 열릴 것 같은 잠금장치가 아슬하게 걸려있고, 어딘가에 부딪히기라도 하면 바로 부서...
* 늦은 업로드 죄송합니다. 분량 문제 때문에 수정과 삭제를 거듭하다보니 늦어졌네요. 이번 화는 너무 길어져서 2화 분량으로 자르게 되었습니다. 하연은 여전히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비명이 울려 퍼질수록 소름이 끼칠 정도로 겹쳐지며 점점 증폭됐다. 자신의 목소리면서도, 아닌 것 같은 소리들. 이건 어쩌면 매달려 있는 뿔족들이 지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자...
탕! 총의 발포음이 휴게소를 벗어났는데도 울려 퍼졌다. 다시 장전하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순간, 하연은 잠시 멈칫했다. 총알이 단번에 셀 수 있을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6발. 아무래도 아까 휴게소에서 가늠하지 않고 쓴 게 문제인 것 같았다. 그래도 약간의 변명을 하자면, 생각보다 많은 괴물의 수에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젠과 반반씩 나눠서...
신(神)들이 만들고 소유한 세계, 신(神)세계. 그 세계에서 전쟁을 사랑하고, 언제나 승리만을 가져오며, 결국에는 평화를 만들어내는 신이 있었어요. 그 신은 구역을 가질 때, 한아름에 끌어안을 수 있을 만큼 유달리 작은 구역을 선택했죠. 그리고는 소중한 자신의 구역을 <스트라테이아>라고 이름 붙었어요. 그 다음으로 신은 자신을 대신해 줄 올리브 ...
질문에도 하연의 대답이 없자, 그자는 부드럽게 입가를 올리며 눈웃음을 지었다. 왼쪽 눈가에 있는 눈밑점이 유달리 도드라져 보였다. 이윽고 고개를 기울이며 영에게 뭐라고 말하는가 싶더니, 가볍게 영을 들처 업고 지상으로 뛰어내렸다.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영에 비해 심지어 땅바닥에 발을 내딛으며 착지하는 모습조차 우아하다. 열쇠와 십자가가 합쳐진 모양의 금...
* 오랜만에 휴일을 받아 휴가를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다음주(5/20)는 휴재입니다. 푹 쉬고 9화로 돌아오겠습니다. 하연이 부딪힐 뻔한 것 외에도 옥상 너머에는 8층 정도 되어 보이는 붉은 십자가들이 지면 곳곳에 박혀있었다. 그 끝이 어디까지인지 완전히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꽤 많았다. 마치 이곳에만 십자가 비가 내린 것 같았다. 모두가 동일하게 커서 ...
하연에게 있어서 죽음이라는 건 별 의미가 없는 단어였다. 그건 대부분의 뿔족들이 다 그랬을 것이다. 뿔족들은 죽음에도, 고통에도 무감각했다. 그건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그렇단 의미였다. 어렸을 때나 죽지 않는다는 사실에 자신감을 품었지, 하연은 성인이 될 수록 그런 주제는 입에도 꺼내지 않았다. 딱히 이유가 있냐하면은, 그것도 아니었다. 그냥 다들 그랬...
하얀 천장을 마주한 채 가만히 누워있던 하연의 눈앞에 얼굴을 일그러뜨린 영이 불쑥 나타났다. "너어!!!!! 나를 밀쳤어? 그 높이에서?? 난 너 같은 뿔족이 아니라고!!!" 하연은 대답 없이 몸을 일으켰다. 아니, 분노한 영이 자신의 옷깃을 잡은 채 흔드는 바람에 자동으로 일어나졌다. 그래도 차분히 엉망이 된 머리를 제대로 묶고 군복을 툭툭 털었다. 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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